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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9)일제강점기의 지방체육 ③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근대 스포츠 발전한 전북

정태화 기자

2020-06-01 13:43

군산의 유서깊은 군산축구구락부. 군산지역에는 1920년대부터 평화축구단을 비롯해 10여개의 축구단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런 축구단들을 통합한 군산축구구락부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축구구락부였다.
군산의 유서깊은 군산축구구락부. 군산지역에는 1920년대부터 평화축구단을 비롯해 10여개의 축구단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런 축구단들을 통합한 군산축구구락부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축구구락부였다.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근대 스포츠 발전
전북지역의 근대 체육은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전주는 전라도 지역의 문물 중심지로 외국 선교사들이 빨리 정착을 하면서 신식학교를 설립해 근대체육 도입이 빨랐다. 미국 남장로교 마르티 테이트 선교사가 1900년 4월 24일 소녀 6명으로 시작한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역시 선교사인 레이놀드가 1900년 9월 9일 단 한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신흥고 등이 대표적이다.

1899년 5월에 개항된 항구도시 군산은 근대체육도 함께 들어와 전북 내에서는 가장 빠르게 체육이 보급되고 발전한 도시였다. 특히 금강 하구에 위치한 군산은 전북 관할이지만 그 상업권이 전남과 충남 일부까지 미쳐 조선 제일의 쌀 집산지로 명성이 높아 ‘쌀의 군산’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며 우리나라 쌀이 일본으로 나가는 통로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다른 어떤 지역보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1925년도 통계에는 일본인이 전체의 30%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도시적 배경으로 전북의 근대스포츠는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1920년대부터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전주에는 1910년 경 백호축구단이 결성됐지만 활동기록을 찾을 수 없고 1920년에는 전주초등학교에 다이아몬드 야구팀, 이해 5월에 군산체육의 첫 걸음이 된 평화축구단이 창단됐다. 고창고보는 1921년 5월 보성고보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정구대회에 출전해 이때 이미 정구는 전북 전역에 당시에 상당히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창고보는 선수들이 서울까지 오기에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참가한 것으로 미루어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이 된다.

야구는 1925년 9월 27일 전주에서 전주고보 대 이리농업이 경기를 가져 전주고보가 3-2로 이겼는데 이것이 지방에서 학교대항 야구경기로는 효시였다.

육상은 1930년 10월 제6회 조선신궁대회 참가한 것이 처음이고 전주신흥고보는 1931년에 조선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전북 농구의 첫 장을 열었다. 배구는 군산고녀가 1936년 조선신궁대회에 출전했으며 군산상업은 1932년에 제7회 신궁대회 탁구에서 중등부 3위를 차지했다. 씨름은 1927년 이리에서 시작해 1932년 고창에서 경기가 개최되었고 이리농림이 1937년 조선신궁대회에서 우승했으며 복싱은 군산출신의 주연형이 1935년 제2회 복싱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군산 오토바이" 채금석은 전국적 축구 스타로 명성떨쳐
이처럼 전북체육의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이리농림이 씨름과 축구에서, 전주북중이 축구에서 전국 최고를 자랑했는데 이 시기의 전북의 최고 스타는 군산의 채금석과 오수철이었다.

김용식과 함께 한국 축구를 주름잡았던 채금석은 달리는 것이 공보다 빠르다고 해서 ‘군산 오토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명중학교 때 전북 군산 지역 최초 체육단체인 평화축구단 선수로 활약했고 1922년, 1923년, 1924년에는 전조선축구대회에 연속 출전해 이름을 떨쳤다. 1925년 일제 강점기에 축구명문으로 이름을 날린 경신중학에 진학해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 2연패 등 각종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주목을 받았다.

경신중학 4학년인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해 퇴학을 당했으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경평(서울·평양)전에 출전해 '조선 축구왕' 김용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그는 1934년에는 조선대표 선수로 중국에 원정, 천진()에서 영국·러시아·중국 대표팀과 북경 보인대학팀과 경기에서 5전 4승1패릏하는 등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쳤다.
오수철은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 선수로 활약하며 백발백중의 명슈터로 명성을 떨치며 광복 후에는 전북체육인 가운데 처음으로 1948년 런던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정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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