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문학개론] 스타크래프트에 숨어 있는 유럽사

2020-06-02 18:37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center
국민게임 '스타크래프트'. 탁월한 전략성 못지 않게 세계관이 탄탄하다. 인문학적 소양이 뒷받침됐다.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국민 민속놀이 '스타크래프트'를 모르는 게이머는 아마 없을 겁니다. 출시 2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PC방 점유율 톱10을 지키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PC 전략게임 등 수식어는 너무나 많습니다. 한국 게이머라면 플레이타임 1000시간을 넘긴 사람도 드물지 않죠.

그런데 혹시 '스타크래프트'에 유럽의 역사가 숨어있단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치밀하게 짜인 '스타'의 세계관은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완성됐습니다. 특히 프로토스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로마의 고대와 가톨릭‧기독교의 중세로 이어지는 역사를 개발자가 몰랐다면 프로토스는 지금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는 종족의 모습은 아니었을 겁니다.

◆프로토스, 그리스에서 시작된 젤나가의 자손

종족명 프로토스는 그리스의 언어인 헬라어(희랍어)의 '최초, 처음'을 뜻하는 '프로토스(πρῶτος, protos)'에서 왔습니다. 프로토스는 게임 내 신적 존재인 젤나가가 최초로 만든 종족입니다. 그래서 게임 내에서 프로토스인들이 스스로를 '첫 번째 자손(The firstborn)'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죠. '스타크래프트2: 공허의 유산'에서의 프로토스 사운드트랙에서도 동명의 음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배반하게 되는 설정도 로마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급속도로 발전한 프로토스 종족 내에서 젤나가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반목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실망한 젤나가가 프로토스를 떠나려 하자 분노한 이들은 젤나가를 공격하기까지 하죠. 지배자가 사라진 프로토스는 젤나가가 떠난 이유를 다른 부족에서 떠넘기는 내전, 일명 '끝없는 전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center
끝없는 전쟁.
로마의 시조이자 최초의 왕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신적 인물 '로물루스'입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510년 왕을 추방하고 부족이 공평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평탄치 않았죠. 귀족과 평민, 로마인과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250년간 전쟁에 시달립니다.

하이템플러 2개를 뭉쳐 탄생하는 무시무시한 위력의 유닛 아콘(Archon)의 한글명은 집정관입니다.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콘은 고대 아테네의 높은 계급의 치안판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아콘이 저글링을 녹이는 모습을 보면 적절한 이름이 아닌가 싶은데요.

center
'스타크래프트2: 공허의 유산' 17번째 미션 '기사단의 귀환'의 로딩 화면. 프로토스 고위 직책명인 집행관, 법무관, 정무관 등도 로마에서 가져왔다.
집정관은 동시에 그리스 로마시대의 절대권력자의 직책이기도 합니다. 1년에 2명이 선출되는 사실상 왕과 비견되는 지도자 계급입니다. '로마의 지성' 키케로로도 집정관 출신이었다면 말 다 한 거죠.

◆암흑의 시대 중세, 영원한 투쟁과 마녀재판

center
칼라 이후 프로토스는 중세 유럽 세계관과 유사하다.
프로토스도 젤나가가 떠나자 내전에 시달리는 칼라이 프로토스와 젤나가를 따라 우주를 방랑하는 탈다림으로 분리됩니다. 절대적 지배자가 사라진 자리에 분열이 자리 잡았다는 모티프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로토스 제국은 부족 간의 전쟁 이후 칼라가 등장하며 평화를 되찾게 됐습니다. 이후 프로토스 종족은 세 개의 계급(카스트)인 심판관(Judicator), 기사단(Templar), 칼라이(Khalai)로 나뉘었습니다. 암흑기로 불리는(최근 사학은 다르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중세의 시작입니다. 종교가 이성을 압도했던 시대죠.

center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
프로토스의 대의회(Conclave)는 가톨릭의 수장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의 모임 콘클라베에서 따왔습니다. 상위 카스트(계급)인 심판관들이 모여 있죠. 심판관은 유럽 역사에서 마녀사냥을 주도했던 '이단심판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16~17세기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권력투쟁, 기근, 식량악화, 전염병 등이 맞물리며 사회는 큰 혼란에 빠져들고 유럽인들은 가상의 적인 마녀를 만들고 처형하면서 내부의 결속을 다지게 됩니다. 이단심판관들은 완고하고 또 잔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프로토스의 대의회, 심판관들도 젤나가의 추종자인 탈다림을 배척하는 완고한 조직입니다. 네라짐들을 증오하고 이들을 때려잡는데 거리낌이 없죠. 대의회는 원정 함대에 심판관 한 명씩을 파견해 고문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center
자동정제소.
가스 채취 방법에서도 프로토스의 종교적 색채가 느껴집니다. '스타2'에서 테란은 프로토스의 차원 이동 기술을 이용해 가스를 순간 이동하는 자동정제소를 개발하는데요. 프로토스는 프로브를 이용해 자원을 채취하는 기술을 고집하죠. 일종의 미스터리였는데, 개발진이 직접 이유를 밝히며 궁금증이 해소됐습니다. 프로토스는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기술사용을 억제하고 있다는 건데요, 과학과 기술을 천대하고 종교를 숭상했던 중세와 겹쳐 보입니다.

◆질럿은 팔레스타인에서 왔다

center
질럿이 여성 리더 '리사 수'를 외쳐 AMD의 승리를 예상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는 '어써어 큐(Issah'Tu!)'의 몬데그린이다.
빠르고 강력한 근거리 유닛 질럿은 14세기에서 유래됐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인들의 침공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한 1세기 유대인 종파의 멤버를 가리키는 말이죠. 원래 '젤롯'이라고 읽습니다. 열성적인이라는 뜻의 'zeal(질)'에서 나온 말입니다. 1630년대에 단어의 뜻이 확장돼 '열성적인 추종자', 즉 광전사라는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center
드라군. 김성모 화백의 만화에서 출발한 애드립은 '그 게임'에서 테사다르와 피닉스가 사용해 공식 블리자드 밈으로 자리잡았다.
드라군(Dragoon)은 근대 유럽의 기마병인 '용기병'에서 가져왔습니다. 실제 존재했던 병종에서 그대로 가져왔으니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게임 내에선 전투 중 부상을 입은 질럿들을 태우는 4조 보행 기계로 묘사됩니다. 실제 용기병은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전투를 할 때는 내려서(!) 총을 쏘는 다소 특이한 병종이었습니다. 이 어정쩡함이 드라군의 다소 불만족스러운 AI(인공지능)에 반영된 건 아닐까요.

center
성전기사단으로 불리기도하는 템플기사단. 13일의 금요일도 템플기사단에서 나왔다.
하이템플러(고위기사), 다크템플러(암흑기사) 등 템플러(Templar)는 중세의 템플 기사단에서 따왔습니다. 성지인 예루살렘의 솔로몬 사원 근처에 본부를 뒀다 해서 '템플 기사단' 이름이 붙었죠. 나중에는 변질됐지만 템플 기사단은 처음에는 신심 깊은 전사로 이름을 떨쳤는데요. 청빈, 정결, 순명의 원칙을 따라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향 아이어를 수호하고자 밤낮으로 훈련하는 하이템플러의 배경 설명과 일치합니다. 여기에 '스타워즈' 시리즈의 선악세력인 제다이 나이트와 다크 제다니의 기믹을 입혔다고 보여집니다.

center
파일런.
프로토스의 '밥통'으로 불리는 파일런(PYLON). 파일런의 어원은 기독교 성당 내부로 통하는 관문입니다. 그러니까 파일론을 먼저 세워야 다른 건물을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수정탑 이라고 번역이 된 건 좀 아쉽습니다. 아마 프로토스 건물에 게이트웨이(관문)가 있기 때문에 의미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center
게이밍 기어로 알려진 '커세어'의 로고가 배인 것도 같은 이유다.
'징징이'로 친숙한 프로토스의 공중 유닛 커세어(Corsair)는 154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출현한 지중해 해적이 그 어원입니다. 이들은 기독교 국가들의 배와 해안을 공격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단순한 해적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를 배척하기 위해 국가가 인정한 일종의 게릴라 개념이었죠. 이들은 영국 등 국가들의 배를 그물로 쏴 나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커세어가 분열망(Disrutipn Web)을 사용하는 겁니다.

◆역사를 모르는 게임에게 세계관은 없다

center
세계관이 별로였다면 '와우(W0W)'의 레이드가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왕년의 블리자드 게임의 세계관이란 건 정말 감탄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외에도 '워크래프트',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디아블로'의 인물 설정과 배경 스토리는 이용자들을 가상현실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창작의 어머니는 모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레퍼런스(참조물)가 창의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블리자드 게임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들을 상상력으로 버무려 설득력 있는 장치로 재창조했기에 현실감 넘치고 웅장한 가상현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는 게 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2000년대 이후 올해의 게임(GOTY)을 휩쓸었던 게임들을 돌아봅니다. 콜롬버스부터 미국의 개척자들까지 '이동'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갓오브워'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해석이고 '젤다의 전설'은 동화, 수렵과 탐험에 대한 고찰이 녹아 있는 게임이죠. '위쳐', '엘더스크림'의 근간을 이루는 건 중세의 삶이며 '레드 데드 리뎀션'에 독창성을 불어넣는 건 서부라는 역사적 배경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인 '바이오쇼크'와 '폴아웃' 시리즈는 종말을 가져온 전쟁과 폭력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죠.

하지만 요즘 나오는 상당수의 한국 게임들을 보면 세계관은커녕 스토리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대충 톨킨식의 '던전앤드래곤' 세계관을 입힌 뒤, '마왕이 쳐들어왔으니 때려 잡아라' 수준에서 더 나아가질 않습니다. 인문학, 특히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식견이 부족한 게 세계관 결핍을 낳는 하나의 원인인 것 같습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