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문학개론] '동급생'부터 'VR카노조'까지, 성인게임의 흥망성쇠

2020-06-16 18:47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center
1922년 출시된 엘프사의 '동급생'. 사진은 후속작인 '동급생2' 캐릭터들.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를 개척한 게임, 도트 그래픽의 진수를 보여준 게임, PC판 성인게임 최초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게임. 아직까지 감이 안 오시나요. 그럼 이렇게 소개하면 어떨까요. 한국 성인 남성이라면 안 해 본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일본 성인게임, 동시에 돈을 주고 샀다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 게임. 맞습니다. 1992년 일본의 엘프사가 출시한 '동급생'입니다.

◆그야말로 뜨거웠던 일본 성인게임 시장

center
웹툰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 분명 '동급생'은 국내서 불법이었지만 90년대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싶다.
'동급생'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념비적 게임이었습니다. 분기를 선택해 연예에 성공한다는 '미연시'의 공식이 '동급생'을 통해 정립됐습니다. 연애게임의 전설 '도키도키 메모리얼'도 국내 미연시의 대표작 '캠퍼스 러브 스토리'도 '동급생'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임들입니다. 미소녀와 주인공 간의 연예전선이 있는 게임이라면 그 뿌리는 '동급생'에서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center
초기 일본 성인게임이었던 코에이의 '나이트 라이프'.
'동급생' 전에도 성인게임은 존재했습니다. 1982년 코에이가 출시한 '나이트 라이프(Night Life)'가 대표적입니다. 삼국지로 유명한 그 코에이 맞습니다. 코에이 뿐 아니라 스퀘어 에닉스, 팔콤 등 유명 회사들도 초기에는 성인게임을 제작하면서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스토리보다는 선정성에 초점을 맞춘 게임들이었습니다.

center
'동급생'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 토끼마저 놓친다는 격언을 체감케 해줬다.
'동급생'은 '연애'가 강조됐다는 점에서 노골적인 노출만을 강조했던 여타 성인게임과 차별화에 성공했습니다. 성애만을 위한 벗기기 게임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취향을 파악하고, 어떤 말을 건네야 하나 고민하고, 데이트 코스까지 짜야하는 그야말로 본격 연애 체험 게임이었습니다. 노출신을 삭제한 청소년 버전으로 플레이해도 충분히 게임을 즐길 수 있을 정도입니다.

center
'로도스도전기'.
'동급생' 이후로 성인게임은 성인비디오(AV)와 함께 일본 성인 콘텐츠 시장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미 기틀을 잡았던 일본의 애니메이션산업은 성인게임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발판이 됐습니다. 작화와 스토리면에서 당대 그 어느 나라보다 인재들이 넘쳐났던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명작 애니메이션 '로도스도전기'의 원화가 타케이 마사키는 '동급생'과 '졸업'의 작화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성(性)진국' 일본의 30년 역사가 시작된 겁니다.

center
야겜이라 깔지만 나중엔 던전경영에 더 심취하는 '둥지짓는 드래곤'.
2000년대까지 일본 PC게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성인게임이 차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엘프사는 '동급생2', '노노무라 병원', '유작', '취작', '애자매' 등으로 입지를 다졌습니다. 2000년대에는 '둥지 짓는 드래곤' 등 시뮬레이션게임으로 유명한 소프트하우스 캐러가 급부상했습니다. '인공소녀', '섹시비치' 시리즈 등 3D 야겜 제작사로 알려진 일루전 소프트도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꽃미남들이 등장하는 여성향 성인게임도 등장했습니다. BL(보이스 러브) 장르의 시초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몰락, '동급생' 이후가 없었다

center
2016년 엘프가 폐업했다.
여기까지는 아마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 분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거의 다 아는 내용일 테니까요. 그런데 이 회사들 지금은 어떤지 알고 계신지요.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엘프사는 지난 2016년 폐업했습니다. 현재는 이름만 남아 DMM 게임즈(DMM GAMES)가 엘프의 게임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코레류의 시초가 된 '함대 콜렉션'을 유통한 회사입니다. 소프트하우스 캐러도 지난 3월 폐업했습니다. 중소 규모의 성인게임 개발사는 줄도산을 면치 못했습니다.

'성진국' 일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기는 서서히, 그리고 복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center
일루전의 막장 게임 'RL'. 지나치게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내용 때문에 자국 내에서도 비판 받았다.
우선 경쟁 심화가 원인으로 꼽힙니다. 돈이 된다 하니 성인게임 시장에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업력이 짧아 실력 있는 개발자나 작화가를 구할 수 없었던 신규 업체들은 선정성만 극대화하는 일명 '누키게(抜きゲー)'를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양산형 성인게임으로 인해 기존업체들의 매출은 감소했습니다. 시장은 저질 포르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게임들로 넘쳐나게 됐습니다. 선정성 면에선 2차 창작물인 '동인지'를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기본적인 짜임새나 스토리도 없이 무성의하게 찍어내듯 나오는 성인게임에 소비자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center
일본의 성인물 회사가 중국에서 발생하는 불법복제를 막기 위해 고안한 워터마크.
기술과 플랫폼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것도 패착이었습니다. 2000년대 온라인에서 콘텐츠가 불법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매출은 곤두박질 쳤습니다. 하지만 게임사들은 이를 막아낼 기술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일본에서 모바일 붐이 불면서 일본 성인게임 시장은 좌초 위기에 몰렸습니다. 모바일로 성인게임을 출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 모바일 마켓의 80% 가량을 차지하는 애플 앱스토어는 불과 작년까지도 성인 콘텐츠 업로드를 막고 있었습니다. 구글 플레이도 이론적으론 성인 콘텐츠 등록을 허용하지만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론에 민감한 소셜미디어도 성인게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center
일본 내에서도 성인게임물은 갈 길을 잃었다(사진=AVGN).
콘솔 시장도 암울했습니다. 다수의 게임기가 경쟁하던 구도에서 닌텐도, 소니 등 몇개 회사가 플랫폼을 독점하는 시장으로 재편됐습니다. 이들 회사는 성인게임 출시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품격에 맞지 않는다는 거죠. 무분별한 성인게임 출시로 업계가 몰락했던 '아타리 쇼크' 사태의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center
'니어 오토마타'. 2B가 있는데 저질 성인게임물이 팔리겠는가.
애초에 성인게임이 해외 판매가 극도로 어려운 콘텐츠라는 점을 고려하면 판로는 오직 하나, PC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텍스트와 작화를 강조한 '비주얼노벨'에 치였고, 미소녀를 앞세운 '모에게임'들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전통적 의미의 일본 성인게임은 선정성, 게임으로서의 재미 모두 신흥강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된 상황입니다.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다시 꿈틀대는 성인게임 시장

center
일루전의 성인 VR게임 'VR카노조(그녀)'. 스팀 버전은 맛보기, 별도 패치를 배포했다.
하지만 성인게임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게임이 가진 몰입적인 경험과 '성애'라는 인간의 본능이 결합할 때의 시너지에 주목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성인게임의 부활을 예고합니다. 시장엔 '커스텀 메이드', 'VR카노조' 등 VR(가상현실)을 접목한 성인게임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습니다.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등 전시회에선 VR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섹스토이들이 출품되고 있습니다. 시각은 물론 촉각(Haptic)까지 구현 가능한 가상 콘텐츠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center
섹스토이. 주변 사람의 민망함까지 책임져주진 않는다.
시장은 거대합니다. 지난해 미국의 투자은행 파이퍼제프레이는 가상현실 포르노 시장 규모가 미국 내에서만 10억 달러(1조1225억 원)에 이를 것이며 오는 2025년에는 전체 가상현실 관련 콘텐츠의 3분의 1이 포르노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세계 포르노 시장은 1500억 달러(168조 원)로 추산되죠.

스팀으로 대표되는 ESD(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도 성인게임 제 2의 전성기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프라인 상점에서 사람들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은밀히 구매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물론 포르노적인 게임 콘텐츠를 플랫폼이 허용하진 않습니다. 나중에 별도 패치를 배포하는 식으로 규제를 피해나가는 방법이 주로 사용됩니다.

◆성인 콘텐츠 불모지 한국, 게임계의 모태솔로 되나

한국은 성인 콘텐츠의 불모지로 부를 만합니다. 에로까지만 가능하고 포르노는 엄연히 불법입니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포르노를 안 본 사람을 찾기 어려운 나라죠. 마치 미군이 성소수자를 대하는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기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불법이지만 대놓고 들키지 않는 한 적극적인 처벌을 하지 않습니다. 음지에서 VPN(가상사설망)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계 성인물 사이트로 접속합니다.

center
김형태 시프트업 대표의 일러스트들.
성인게임 산업은 불모지를 넘어 황무지입니다. 섹슈얼리티를 강조했던 게임은 '애들은 가라'며 성인게임을 표방했던 'A3', 시프트업의 '데스티니 차일드', 스마트조이의 '라스트 오리진' 등 한 손에 꼽아도 충분할 정도입니다. 이들 게임은 19금을 달고 나왔지만 선정성 논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성교를 담은 게임도 아니었지만 '야하다'고 여론의 폭격을 견뎌야 했죠. '창세기전' 시리즈, '블레이드&소울' 등의 작화를 담당한 김형태 작화가(시프트업 대표)가 탁월한 그림 솜씨에도 불구하고 게임 출시 때마다 사회적 지탄을 마주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인물에 대한 역사가 짧은 것도 한 몫 합니다. 한국에서 성산업이 시작된 건 1980년대 전두환 정부의 3S 정책을 기점으로 봅니다. 유교문화의 색채가 강한 탓에 성인물이 양지로 올라오기 어려웠습니다.

분명 제도와 현실은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인물에 대한 수요는 아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음지에만 가둔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지난 2018년 불거진 웹하드 게이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법 포르노로 수천억 원대의 이득을 챙겼죠. 보복의 목적인 불법 촬영물이 공유됐지만 음지에 숨어있던 탓에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이를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center
게임물등급위원회의 심의 벽을 넘지 못한 '뉴 단간론파 V3'. 회의록 공개를 거부해 거부 이유도 불명확하다.
현행 게임법은 성인게임물에 재갈을 물리고 있습니다. 게임법 32조 2항 3호는 '범죄, 폭력, 음란 등을 지나치게 묘사하여 범죄심리 또는 모방심리를 부추기는 등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는 게임'의 유통을 금지한다고 명시합니다. 어디까지가 음란이고,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지 애매합니다. 그간 게임물등급위원회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회의록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위 등급분류 결정에 참여하는 소수 위원들이 '음란한 게임'이라고 하면 반항조차 못하고 게임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장일까요.

center
산업적으로도 성인게임의 실종은 큰 손실입니다. VR게임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사회적 분위기와 규제 탓에 한국 게임계에는 '애정'이라는 주제가 금기시된 지 꽤 됐습니다. 개발력이 있는 대형 게임사들은 혹시나 트집을 잡힐까 봐 개발을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RPG(역할수행게임)나 캐주얼, 또는 스포츠게임이 '안전빵'으로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가장 강렬한 동기, 인기 있는 콘텐츠로 만들 수 있는 소재를 봉인해 둔 것과 다름없습니다. 현재는 '갓오브워', '더 위쳐', 'GTA' 시리즈 정도의 성애도 한국게임에선 그려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l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