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문학개론] 왜 한국에는 '갓겜'이 없을까

2020-08-11 18:33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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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티독의 명작 '라스트오브어스'. 왜 우리는 '라오어'와 '위쳐' 같은 갓겜을 만들 수 없단 말인가. 정녕 한국 게임사들이 돈에 미쳐있기 때문인가.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최근 한국게임업계를 향한 비판이 매섭습니다. 천편일률적인 양산형 게임만 쏟아질 뿐 게임다운 '갓겜'은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혐오섞인 발언들이 보입니다. 외국 콘솔 AAA급 풀프라이스급 게임들이 한국의 모바일게임을 비판하는 '갓겜'의 예시로 사용되곤 합니다. 외국은 되는데 왜 한국은 안 될까요. 안하는 걸까요 아니면 못하는 걸까요. 콘솔시장과 한국의 역사를 버무려 왜 한국에서 AAA급 콘솔게임을 제작하기 어려운지 설명해볼까 합니다.

◆직장인 두 달 월급 모아도 아타리 2600 못 샀다

최초의 게임에 대한 이론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최초의 상업용 비디오 게임이 '퐁(Pong)'이라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퐁'은 양쪽에서 막대기 두 개가 공을 주고 받는, 지금에서 보면 지극히 단순한 게임입니다. 하지만 전자오락이란 새로운 매체에 시장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놀이에 대중이 눈을 뜬 겁니다.

아타리는 콘솔게임기의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는 거치형 게임기 '아타리2600'을 북미에 출시하면서 안방을 장악합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팩맨' 등 인기 게임을 술집이 아닌 거실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었죠. 바비인형으로 유명한 마텔 등이 '타도 아타리'를 외치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아타리의 아성을 허물기는 어려웠습니다. 그 유명한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타리는 북미에서 돈을 쓸어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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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 2600'.
여기까지는 게이머라면 한 번 쯤 들어본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역사적 시점을 고려하면 이야기가 색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퐁'이 나온 게 1972년, 아타리 쇼크가 터진 게 1983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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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은 어땠을까요. '강남 1970'이란 영화를 보면 아파트가 아닌 논밭으로 가득 찬 강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수도였던 서울마저도 도시화가 완성되지 않았던 '새마을 운동'의 시대였습니다. 지방은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이 흔했습니다. 농업 중심의 1차 산업에서 산업화 단계인 2차 산업 구조로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습니다. 한국 국민이 1년간 벌어들인 돈, 국민총소득(GNP)이 1000 달러를 돌파한 게 1977년입니다. 월급으로 따지면 한 달에 100달러도 벌어들이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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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국의 GNP(사진=한국은행).
아타리 2600의 기기가격이 199 달러였고, 롬팩(카트리지)의 가격이 25 달러 정도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경제규모로 보면 직장인이 두 달 월급을 모아도 아타리 2600을 살 수가 없었다는 거죠. 흔히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3000 달러를 넘어야 국민들이 여가 생활의 신경을 쓸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1983년이 되서야 3000 달러의 벽을 넘겼습니다. 미국에선 거실에 당연히 TV가 한 대 씩 놓여있었지만 한국에선 연속극을 보러 저녁이면 TV가 있는 집에 몰려가야 했던 격차가 존재했습니다.

◆닌텐도, 세가, 소니의 콘솔 전쟁…미국과 일본의 초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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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한국 화투, 일본 초기 하나후다, 일본 후기 하나후다. 화투를 만들던 구멍가게가 이렇게 클 줄이야.
아타리 쇼크 이후 30억 달러 수준이었던 게임시장 규모가 1/3 토막이 나는 침체기가 찾아 왔습니다. 게임시장에 새로운 부흥기를 가져온 건 '하늘에 운명을 맡긴다'는 특이한 사명의 일본 회사였습니다. 188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라는 이름의 사업가가 교토에 작고 허름한 가게 하나를 열었습니다. 야마우치는 포르투갈 선원들이 들여온 카드게임을 변형한 '하나후다(우리나라 화투에 영향을 미친 일본의 놀이)'라는 상품을 도박장에 팔아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1948년 와세다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하던 손자 야마우치 히로시가 회사를 물려받아 비디오게임 사업에 뛰어듭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카드를 팔며 쌓아놓은 유통망을 이용해 사세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다 미국에까지 자신들의 비디오게임을 수출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이 회사가 바로 '마리오'로 유명한 일본의 거대 콘솔 회사 닌텐도입니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자신의 사위이자 MIT를 졸업한 인재 아라카와 미노루를 앞장세워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NOA)를 세웁니다. 그 뒤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얘기죠. '동키콩'이 탄생했고, 그 등장인물 중 하나였던 배관공이 천재 개발자 미야모토 시게루의 상상력을 통해 '마리오'로 거듭나게 됩니다.

닌텐도의 독주에 맞서기 위해 세가의 미국 지사인 세가 오브 아메리카(SOA)가 설립되고, 여기서 건방지지만 쿨한 지극히 미국적인 고슴도치 '소닉'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절대 강자 닌텐도와 도발적인 마케팅으로 닌텐도를 공략했던 세가, CD형 게임기로 콘솔시장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소니까지. 초기 콘솔시장은 미국과 일본의 독무대였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집이 있고 전기가 통하고 게임기와 TV를 집마다 한 대 씩 구비할 수 있었기에 콘솔시장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겁니다.

◆대기업은 손 떼고, TV는 거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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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재믹스'.
한국의 콘솔시장은 90년대 미국과 일본 제품을 수입하는 식으로 시작됐습니다. 삼성전자는 세가와 손을 잡고 '슈퍼 알라딘 보이(메가드라이브)'와 '삼성새턴(새턴)'을 내놓았고, 현대가 닌텐도의 '슈퍼패미컴'을 '슈퍼컴보이'로 가져왔죠.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게임기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부자친구 집에 놀라가 '한판만 해보자'며 애걸복걸해야 될 정도의 물건이었죠.

한국에서 콘솔게임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와 문화 두 가지 변수를 따져봅시다.

한국은 너무 빨리, 압축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데 고작 70년이 걸렸습니다. 콘솔시장이 한국에서 개화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대기업들은 콘솔에서 하나 둘 손을 뗐습니다. 중공업, 건설 등 기간산업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콘텐츠 사업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영역이었기 때문이죠. 90년대 한국 게임시장의 규모는 말 그대로 '애들 호주머니' 수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기술을 개발하고 값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장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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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온가족이 모여 보는 TV에 게임기를 연결할 각이 안 나왔다(사진=tVN '응답하라 1988').
게임은 죄악시됐습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게임을 하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중산층이 지하실 난로 옆에서, 방안 쇼파에 누워 콘솔게임을 할 때 한국의 게임 꿈나무들은 언제 엄마가 들이닥칠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문을 흘겨봐야했죠. 엄마가 들어오면 공부는 안하고 게임만 한다는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습니다. 엄마의 연속극과 아빠의 9시 뉴스에 TV를 내줘야 했습니다. 방이 아닌 거실 위주의 생활방식이 남아있었고, TV는 거실의 정중앙에 있는 고급 가구였습니다. 고작 게임기 따위가 TV를 점거할 순 없었던 겁니다. 한국은 콘솔이 자라날 수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새벽, PC통신, PC방… 한국게임의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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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슈퍼보드 환상서유기'. 1990년대 후반 KCT미디어에서 발매한 패키지게임으로 잘 만들었지만 많이 팔리진 않았다.
변곡점이 찾아옵니다. 90년대 후반이 되자 슬슬 집안에 개인용 컴퓨터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한국의 게임은 음지로 숨어들었습니다. 전화선을 훔치다 시피해서 PC통신에 접속, 밤새 부모님 몰래 게임을 다운받아 즐겼습니다. 컴퓨터가 없으면 삼삼오오 부모님의 눈을 피해 방과 후 PC방으로 달려가 근거리 통신망으로 '스타크래프트' 멀티 플레이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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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과 바람의 RPG 3부작의 마지막 '나르실리온'.
PC 보급에 발맞춰 국내에도 패키지게임이 등장합니다. 가람과 바람, 손노리, 소프트맥스, 엘엔케이로직코리아, 판타그램 등등등. 윤동주의 '별 헤는 밤'처럼 아스라이 멀지만 동경을 담아 되뇌는 이름들입니다. '드래곤 퀘스트' 류의 JRPG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그래도 한국정서에 맞춘 토종 게임의 출발이었습니다. DLC도 추가 패치도 없는 그야말로 풀프라이스 게임이었습니다. 손오공과 한빛소프트 등 유통사(퍼블리셔)들이 등장해 유명 외산게임들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죠.

'아재 게이머'라면 십중팔구는 한국 게임의 황금기로 추억하는 시대죠. 매달 공략집과 게임 뉴스를 담은 게임잡지를 서점에서 사 모으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부록 CD(쥬얼 CD)가 주는 즐거움도 대단했죠. 게임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패키지 시장의 몰락, '내돈내산'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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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브로드밴드(당시 하나로텔레콤)는 세계 최초 ADSL을 상용서비스했다. 광고 모델은 당시 한국인이었던 유승준(현 미국인 스티븐 유).
2002년 전국적으로 ADSL(비대칭형 디지털 가입자망)이 깔리기 시작하자 패키지 시장은 삽시간에 몰락했습니다. 패키지게임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와레즈로 시작해 토렌토로 이어지는 불법 게임 다운로드의 문이 열려버린 겁니다. 이 충격을 이길 만큼 자본을 축적할 수 없었던 한국 개발사들은 파산과 부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한국 패키지 시장의 몰락은 예견돼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콘솔 단계를 건너뛰었기에 생기는 문제였고 게임을 배척하는 양육 방식이 잉태한 비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게이머는 게임에 돈을 써 본 역사가 없습니다. 내 돈 주고 사서 플레이한다는 경험이, 더 나아가 인식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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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게임은 경험치를 모으지 않고 단번에 성장해 버린 점핑캐릭터와 닮아있다.
90년대 주류 게이머는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까지였습니다. 중고생이 패키지게임 하나를 사려면 몇 달 용돈을 모아야했죠. 부모님은 게임에 몇만 원을 쓰는 자녀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네 컴퓨터 수리점에서 암암리에 해적판을 사들였고 잡지 부록 CD를 기다렸습니다. 대학생들은 나우누리나 천리안에서 게임을 다운받아서 즐겼죠. 전화요금은 냈겠지만 저작권자에게 비용을 지불한 적은 드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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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레즈(Warez). 불법으로 컴퓨터 정품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사이트.
PC방은 어떻습니까. PC 이용료를 낸다는 생각이었지 패키지 형태의 게임을 사는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시대였다 보니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죄책감도 덜했습니다. '재미있는지도 모르는데 일단 해봐야 하는 게 아니냐'와 '해보니 돈 주고 살만큼 재미도 없더라'라는 지옥의 이지선다에 저작권은 논파 당했죠.

1세대 게이머 중 일부는 온라인게임 시장에 '오베족'으로 이어집니다. 게임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되는 오픈베타 기간 동안만 플레이하다가 유료 정액제로 정식 서비스에 들어가면 대규모 이용자 이탈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잠깐 '찍먹'만 하다가 새 게임이 열리면 다시 우루루 몰려갔다가 떠나는 메뚜기짓을 반복했습니다. 커뮤니티 성이 중요한 온라인게임에서 이용자 이탈은 곧 게임성의 악화로 이어집니다.

오픈베타 때는 사람이 미어 텨저서 서버를 확충했지만 막상 수익화를 하려고 하면 깡통만 차는 게 일상화됐습니다. 넥슨의 '퀴즈퀴즈(큐플레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밌다고 칭찬은 많았지만 유료화와 동시에 서비스 종료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다 반신반의하면서 시도한 부분유료화가 대박을 쳤고 한국 게임사들은 넥슨의 교훈을 빠르게 학습했죠.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플레이는 공짜로, 게임 내에서 아이템을 판매하는 F2P, P2W 구조가 고착화 된 겁니다.

◆플랫폼 시대, 허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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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게임 플랫폼.
2010년대 카카오톡, 구글 플레이 등 플랫폼들도 한국 게임사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폰이 들어오고, 모바일게임에서 적은 투자로도 굉장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풀프라이스 게임을 만들려는 게임사들은 멸종했습니다. 플랫폼에서 추천이 되고, 광고가 걸리는 '노출도'가 게임 매출과 직결되기 시작합니다.

모바일로 전환에 성공한 대부분의 중형게임사들은 몸값을 한껏 높여 거대 게임사와 합병을 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거대 자본에 의한 대규모 마케팅이 성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TV에서 연예인을 앞세운 게임광고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이맘때쯤입니다. 다른 개발사들은 개발 인력을 축소하고 유통에 집중하는 퍼블리셔로 변신했습니다. 적당한 게임을 골라 마케팅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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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센트의 마스코트 펭귄. 생긴 건 귀여워도 시장 장악력이 발군이다.
급속도로 모바일게임 시장이 성장하던 중국은 이 타이밍에 한국의 개발자들을 높은 몸값을 주고 데려갔습니다. 이들이 중국에 뿌린 개발의 씨앗은 2010년대 한국에서 '중국 게임의 역습'이란 타이틀로 언론을 탑니다. 텐센트, 넷이즈 등 중국의 유명게임사들이 한국 게임 IP(지적재산권) 유통과 개발력을 바탕으로 급성장을 이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죠. 덕분에 한국에는 중형규모의 개발사, 다시 말해 산업의 허리가 실종됐습니다. 극소수의 개발자가 골방에서 개발했다 창의성만 인정받고 사라지는 인디게임과 과거의 유산을 고아내는 대형 게임사들만 존재하는 양극화의 구조입니다.

◆만든다고 될까 VS 그래도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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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A 있어요? 아니 없어요. 팔렸어요? 아뇨 원래 없어요(사진='슈퍼스타K2').
누군가는 이제라도 풀프라이스 AAA 갓겜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돈도 벌만큼 벌었으니 이젠 격을 높일 때가 아니냐는 거죠. 현재로선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은 얘깁니다. 패키지 시장의 몰락은 게임 뿐 아니라 그런 게임을 만들 개발자가 사라졌다는 걸 뜻합니다. 아트, 스토리, 코딩, 라이브 기술, QA 모두가 모바일에 최적화돼 있습니다.

몇 명의 유명 개발자를 데려온다고 단번에 미국과 일본의 콘솔 개발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콘솔 초기처럼 서드파티 개발사 하나가 수십개의 게임을 내놓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수백명을 투입해 몇십, 몇백억 원을 부어 AAA급 하나를 선보이는 대작화의 경향이 뚜렷합니다.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세계가 경쟁하다보니 어중간한 게임은 발을 붙일 자리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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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한국 게임시장은 패키지 시장이 몰락한 폐허 위에 세워졌다.
80년대부터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축적한 미‧일을 한국이 1, 2년 반짝해서 누를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무엇보다 한국 게이머가 풀프라이스 게임을 사줄 거라는 기대감이 없습니다. 현재 한국 게임사들의 대표들이 패키지 시장의 비극을 쉽게 잊어버릴 리 없습니다. 이들이 바로 갓겜을 만들어도 망한다는 걸 보고 자란 1세대 게이머들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몇 게임사에서 콘솔 게임을 개발, 출시하고 있습니다. 응원은 한가득 이지만 기대보다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주요 매출원이던 중국은 게임 문호를 걸어 잠군 지 오래고 한국의 시장 규모는 더 이상 커지기 어려울 정도로 팽창해 있습니다. 이마저도 확률형 아이템을 통해 1인당 소비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위태로운 모델이라는 걸 부인할 업계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북미를 공략하기에는 구조적으로나 개발력으로나 녹록치 않습니다. 그간 불모지였던 남미, 동남아의 문을 두드리지만 시장의 규모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IP 강국 일본에선 한국의 IP가 크게 어필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 콘솔게임을 개발 중인 게임사 관계자가 툭 내뱉은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게이머들이 기대감이 장난 아니라고, 응원한다는 말에 그는 "그게 얼마나 팔릴 거 같냐"고 답했습니다. 들뜬 마음이 착 가라앉고 얼굴을 구긴 채로 소주를 털어 넘겼습니다.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그래도 만들어야 한다는 씁쓸함이 느껴져 한동안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