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메뉴
닫기

닫기

[겜문학개론] 전설이 된 게임들, 태초에 동사가 있었다

2020-11-17 18:05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해마다 수천 개의 게임이 쏟아집니다. 기술력은 좋아지고 제작비도 날로 높아집니다. 게임의 홍수 속에서도 고고하게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명작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저 재미있는 게임과 위대한 게임을 가르는 걸까요. 시금석이 된 게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의 '동사(動詞)'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는 겁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벽돌깨기에 긴장을 끼얹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스페이스 인베이더'.
1978년 출시된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단순한 게임입니다. 스토리나 엔딩도 없었죠. 그저 총알을 쏴서 외계인을 맞히는 게 다라고 봐도 무방하죠. 기본적인 규칙은 '벽돌깨기(브레이크 아웃)'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일본에선 '스페이스 인베이더' 전용 게임방이 우후죽순 생겼고, 전국적으로 100엔짜리 동전이 바닥이 났습니다.

차이를 만든 건 적이 '공격한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전까지는 적이 만만한 게임이 좋은 게임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동전을 넣으면 정해진 시간을 플레이할 수 있는 '퐁' 같은 게임이 시장의 주류였으니까요. '스페이스 인베이더' 신제품 발표회에선 혹평을 들었습니다. 적이 공격을 해서 죽을 수도 있는 게임을 누가 좋아하냐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적이 강력할수록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때 플레이어가 느끼는 성취감도 강해지는 걸 게임계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 영국의 소설가 마틴 에이미스는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혁신을 '스크린상에서 진짜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피자에서 시작된 '팩맨'

올해로 출시 40주년을 맞은 '팩맨'.
올해로 출시 40주년을 맞은 '팩맨'.


1970년대 후반,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아류작들이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모두 '제 2의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목표로 에일리언을 쏴 죽이는 게임 만들기에 몰두했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남성 중심적인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었죠.

남코의 젊은 개발자 이와타니 토루는 '삐딱선'을 탔습니다. 여성을 겨냥한 '여성향 게임' 제작에 착수합니다. 그는 '먹는다'는 동사에서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먹는 것에 흥미를 가질 거라는 발상이었죠. 어느 날 점심 때 주문한 피자를 베어 먹다 입을 벌리고 있는 캐릭터를 떠올립니다. 지구상 가장 위대한 게임 중 하나로 꼽히는 '팩맨'의 탄생설화입니다.

팩맨이 쿠키를 모두 먹어 치워야한다는 스테이지 클리어 목표를 세웠습니다. 점들에 불과했던 그래픽 쪼가리에 서사가 생겼습니다. 시금치 통조림을 먹으면 강해지는 뽀빠이에서 '파워업' 개념을 가져왔습니다. 1988년 5월22일 일본 시부야에서 탄생한 '팩맨'은 다시 여성들을 게임계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게임에 미숙한 여성 플레이어들을 위해 중간에 휴식 시간을 도입했는데, 훗날 게임 역사 사상 최초의 '컷신'으로 불리게 됩니다.

'팩맨'의 성공은 게임의 역사에서 '캐릭터'를 발굴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용자가 자신을 투영하고 몰입하는 '캐릭터'의 중요성이 '팩맨'을 통해 발견됐습니다. 남코는 넥타이, 전화기 등 450여가지의 '팩맨' 관련 상품을 출시했습니다. '팩맨'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나 음반도 발매됐습니다. 합병될 형편이었던 회사가 역으로 인수하려 했던 회사를 삼키는 걸 말하는 '팩맨디펜스'라는 경제용어도 이 게임에서 나왔습니다.

◆중력을 거스른다, '동키콩'과 '슈퍼마리오'

'동키콩'.
'동키콩'.


닌텐도 미국 지사는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아류작 '레이더스코프'로 일본에서 쏠쏠한 재미를 본 닌텐도는 자신감을 얻어 미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지만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이미 시장에 인베이더류가 넘쳐나고 있어서 닌텐도는 '듣보잡'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판로를 찾지 못해 창고에선 '레이더스코프' 게임기 수천 대가 썩고 있었죠. 창고 보관료도 지불하기 어려울 정도로 닌텐도는 휘청거렸습니다. 닌텐도를 구원한 건 보이스카우트 출신의 시골 청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맥으로 닌텐도에 낙하산 입사를 한 그에게 '레이더스코프'를 대체할 '땜빵' 게임을 개발하라는 특명이 내려왔습니다.

최초 계획은 뽀빠이를 소재로 한 게임이었지만 저작권 사용 계약에 실패하자 당시 유행한 영화 '킹콩'에서 소재를 가져옵니다. 예쁜 여자를 고릴라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는 게임은 예상외의 대박을 쳐서 닌텐도를 부흥시킵니다. 장애물을 점프해서 피하는 손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이 게임의 이름은 바로 '동키콩', 개발자는 미야모토 시게루입니다. 공주를 구하는 목수 캐릭터의 이름은 '점프맨', 훗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관공 '마리오'로 진화합니다.

◆벌레 박사, 거대 산업을 잡다

'포켓몬스터 레드'와 '포켓몬스터 블루'.
'포켓몬스터 레드'와 '포켓몬스터 블루'.


타지리 사토시는 친구들 사이에서 벌레 박사로 불렸습니다. 도쿄 교외의 시골 마치다시에서 자란 사토시의 취미는 곤충 수집이었죠.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도시가 재개발되기 시작했고 곤충 채집도 막을 내리는 듯했습니다. 대신 '테트리스'와 게임보이,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청소년기를 채웠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사토시는 '게임 프리크'라는 게임 잡지를 내면서 본격적인 업계인으로 성장합니다. 잡지를 통해 만난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동명의 게임회사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유년시절의 향수가 게임의 방향성을 결정지었습니다. 전자적으로 곤충을 '잡는' 게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게임보이의 특성을 살려 근거리 통신으로 수집한 곤충을 교환한다는 아이디어를 추가합니다. 그리곤 6년, 우여곡절 끝에 세상을 뒤흔든 게임, '포켓몬스터'가 세상에 출현합니다.

'포켓몬스터'는 현대의 신화가 됐습니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장난감 등 사실상 모든 엔터테이먼트 산업에 발을 걸치고 있는 메가 프렌차이즈입니다. 2016년 AR(증강현실) 기술을 도입한 '포켓몬GO'의 출시로 사토시의 꿈은 날개를 달게 됐습니다.

◆목 디스크 주의, '헬테이커'

'헬테이커'는 즐기는 자가 만든,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헬테이커'는 즐기는 자가 만든,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짧지만 움직임에 관해서 꼭 언급하고 싶은 게임이 하나 있습니다. 올해 5월 출시된 인디 게임 '헬테이커'입니다. 게임 플레이 시간보다 덕질 하는 시간이 더 길다는 마성의 게임이죠.

게임 스토리는 황당합니다. 어느 날 눈을 뜬 남자가 악마들로 이뤄진 하렘을 만들고 싶다며 지옥으로 뛰어듭니다. 플레이 타임은 두 시간이면 넉넉합니다. 퍼즐의 난이도나 완성도도 명작의 반열에 들기엔 좀 엉성하죠.

처음엔 이게 뭔가 싶다가 어느 순간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합니다. 폴란드산 목탁비트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는 정장 악마들에 빠져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적들도, 보스도, 천사도, 심지어 등불도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어댑니다.

'헬테이커'는 정적이라는 퍼즐게임 장르의 한계에 과감히 반기를 듭니다. 어떤 미사여구보다 '흔들거리다'는 동사야 말로 '헬테이커'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죠. 언리얼 엔진이나 강렬한 특수효과 없이도 세상 신나는 '둠칫둠칫'을 구현해 냅니다.

*헬테이커 지옥 노동요



◆형용사도, 명사도 말고 동사가 그립다

게임이 저마다 화려한 형용사와 명사를 달고 이용자들의 유혹하지만 승부는 동사에서 결정되는 듯합니다. 수식어만 달라졌을 뿐 게임의 핵심은 어디서 본 것들을 가져다 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타인의 욕망을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른들처럼 숫자와 업적 같은 명사에 집착합니다.

사랑받는 것들은 동사의 형태, 움직씨로서 작동합니다. 머릿속에서 남의 집 개는 멈춰있는 명사지만 우리집 순돌이는 꼬리치며 배를 보이며 반깁니다. 게임은 처음부터 움직임의 예술이었습니다. 독창적인 동사를 발견할 때 하나의 장르가 탄생했습니다. 언젠가는 배틀로얄도 AOS(적진점령),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도 유행이 저물겠죠. 새로운 재미의 가능성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동사에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

desk@dailygame.co.kr

HOT뉴스

최신뉴스

주요뉴스

유머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