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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50)마라톤이야기⑪시베리아횡단열차로 보름만에 베를린에 도착해 또 평가전

정태화 기자

2020-12-01 07:45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마라톤 대표들. 오른쪽부터 사토 코치, 남승룡, 손기정, 시오아쿠, 스즈끼 선수, 모리타 감독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마라톤 대표들. 오른쪽부터 사토 코치, 남승룡, 손기정, 시오아쿠, 스즈끼 선수, 모리타 감독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보름만에 베를린에 도착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는 조선선수는 손기정, 남승룡 뿐만이 아니었다. 축구에 김용식, 농구에 장이진 염은현 이성구, 그리고 복싱에 이규환 등 모두 7명이었다. 물론 실력으로보면 여러차례 세계최고기록을 세운 역도의 남수일과 레슬링의 황병관을 비롯해 일본축구를 호령했던 경성축구단 선수들이 포함되어야 했지만 일본은 조선선수들을 최소한만 선발했다.

마라톤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다른 육상 선수들보다 일주일 앞서, 본진보다 3주일 앞서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시차 적응,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필요하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이 마라톤에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를 증명해 준 사례이기도 했다

베를린으로 떠나기 앞서 경성에서 마지막 훈련을 한 남승룡(오른쪽)과 손기정
베를린으로 떠나기 앞서 경성에서 마지막 훈련을 한 남승룡(오른쪽)과 손기정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6월 2일 경성에 도착한 마라톤 선수 일행은 양정고보에서 열린 격려회에 참석한 뒤 6월 4일 오전 10시 사토 코치와 함께 우리 땅에서 하는 마지막 연습이라며 숙소인 태평장을 떠나 남대문앞을 출발해 대한문~황금정통(을지로)~경성운동~종로5가를 도는 약 6마일을 달렸다. 그리고 오후 3시 30분 경성역에서 양정고보 학생들과 조선체육회 간부, 각계 인사 수백 명의 성대한 전송을 받으며 봉천을 거쳐 올림픽이 열리는 베를린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손기정 등 일행을 실은 기차는 신의주~단동~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하기까지 보름이 걸렸다. 열차는 예고도 없이 멈추고 또 어떤 때는 하루 종일 호수를, 또 어떤 날은 만주와 시베리아의 광활한 땅을 지나기도 했다. 손기정은 고향인 신의주에서 소식을 듣고 나온 고향사람들과 반가운 해후를 하고 단동에서는 그리운 어머니와 형, 누나도 만났다.

이렇게 베를린에 도착한 뒤 사흘 만에 선수촌에 들어갔다. 숙소는 2인 1실로 손기정은 시오아쿠와 한방을 쓰고 남승룡은 스즈키와 같이 생활했다. 선수촌에서 처음으로 스테이크와 빵으로 식사를 했지만 식성에 맞을 리가 없었다.

베를린 현지에서 훈련을 하는 남승룡과 손기정 선수
베를린 현지에서 훈련을 하는 남승룡과 손기정 선수
손기정은 연습할 때에도 일장기가 달린 옷은 잘 입지 않았다. 왜 일장기가 달린 옷을 입지 않느냐고 물으면 ‘너무 귀한 옷이라서 아끼려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사토 코치도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때의 츠다처럼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손기정과 남승룡을 빼고 시오아쿠와 스즈키만 따로 불러내 컨디션 조절 훈련을 시키고 시내에 나가 일본 음식을 먹고 들어오는 등 차별하는 일이 잦았다.

4명의 선수들이 긴장 속에서 훈련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때 남승룡은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그와 함께 메이지대학에 다니는 높이뛰기 일본 기록을 보유한 아사쿠마의 전보였다. 마라톤 선수들보다 늦게 도쿄를 출발한 육상 본단과 함께 출발한 아사쿠마는 열차 안에서 일본 임원들이 마라톤에는 기록에 관계없이 조선인 1명은 무조건 제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를 남승룡에게 전보를 통해 알려 주었다. 그런 낌새를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 투지가 솟았다.

이런 가운데 경성에서 만주철도국에 다니던 권태하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다니던 정상희, 그리고 미국서 귀국한 현정주가 우리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베를린을 찾았다. 조선체육회 임원 자격으로 독일에 온 것이지만 모두 자비였다. 이들 세 선배의 베를린 방문은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더할 수 없는 응원군들이었다.

특히 권태하는 8월 4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마라톤에 우승할까“라는 제목으로 상, 중, 하 3회에 걸쳐 베를린 현지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의 훈련 소식이나 마라톤 선배로서 훈련 방법, 컨디션 조절 등에 대해 기사를 게재하며 ’손기정의 마라톤 입상은 확정적‘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손기정은 훗날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베를린올림픽 우승까지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또 많은 분들이 도와주었지만 그 가운데 눈물겹도록 고마웠던 분은 박봉을 털어 매달 2원씩 보태주었던 양정의 김수기 선생과 자비를 들여 이곳까지 날아와 응원해 주신 정상희, 권태하 두 선배에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베를린 현지에서 벌어진 선발전
조선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마라톤 우승을 할 것이라고 희망과 기대를 걸었고 일본은 일본대로 모두가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으니 누가 우승해도 괜찮지만 그래도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우승하기를 바랐다.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베를린 현지 언론들의 이목은 아무래도 세계기록을 세운 손기정에게 쏠렸고 기록대로라면 일본이 1, 2, 3위를 모두 차지할 수도 있다는 보도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이런 가운데 일본과 함께 금메달 후보로 꼽히는 아르헨티나가 연습 레이스를 제의해왔다. 지난 대회인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우승자인 자발라를 다시 우승시키기 위해 대신 올리버로 하여금 일본 팀의 컨디션을 탐색하려는 것이 아르헨티나의 속셈이었다.

서로가 가장 강력한 우승 라이벌로 여겼던 아르헨티나의 제의에 일본도 호응해 연습레이스는 7월 2일 마라톤의 반환점 부근에서 열렸다. 이날 연습레이스에서는 손기정은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만 유지했다. 이 바람에 남승룡이 막판에 스퍼드, 1위로 골인하고 2위가 올리버, 3위가 손기정이었다.

사실 일본은 손기정의 일거수일투족, 식사나 수면상태 등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다.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 독일과 함께 세계 우등 민족임을 마라톤을 통해 과시하고 싶었던 일본의 꿈이 바로 손기정의 두 발에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그러면서도 도쿄에서 조건으로 내 걸었던 베를린 현지에서의 기록 평가회를 강행했다. 이미 스즈키가 한차례 열병을 앓아 컨디션도 엉망인데다 훈련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사실상 마라톤 대표는 손기정과 남승룡과 시오아쿠로 확정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라톤 최종 엔트리 마감일(7월 18일)을 늦춰가면서까지 7월 22일에 기록 평가회를 고집한 이면에는 조선인 2명을 출전시키고 싶지 않은 검은 속셈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풀코스는 무리라고 판단해 30㎞로 줄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경기는 예상대로였다. 손기정이 나는 듯이 선두로 달리고 그 뒤를 3명이 따랐다. 14㎞ 지점을 지나면서 스즈키가 기어코 기권을 하고 말았다. 더 이상 선발전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레이스는 계속됐다.

이때 시오아쿠가 정상 코스 500m 정도 짧은 옆길로 빠지는 반칙을 저질렀다. 마침 손기정과 남승룡을 응원하기 위해 베를린 현지에 온 권태하와 정상희가 이를 발견했다. 시오아쿠는 권태하의 경고도 아랑곳하지 그대로 달렸다. 결승점에 도착할 즈음 2위로 달리던 남승룡의 앞에 느닷없이 시오아쿠가 나타났다. 막판 스퍼트에 강한 남승룡이 간신히 이를 따라 잡았지만 일본 선수단이나 일본 언론들은 어느 누구도 이를 탓하지 않았다.

시오아쿠가 코스를 이탈한 비겁한 반칙은 남승룡을 탈락시키려는 사토 코치를 비롯한 일본 선수단의 장난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를 증명할 길은 없었다. 결국 스즈키는 10000m에, 마라톤에는 손기정, 남승룡과 시오아쿠가 출전하게 됐다.

이런저런 해프닝과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결전의 날인 8월 9일은 서서히 다가왔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정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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